Advertisement banner image
Advertisement banner image
Image at ../data/upload/5/2621075Image at ../data/upload/3/2621013Image at ../data/upload/8/2620898Image at ../data/upload/3/2620793Image at ../data/upload/9/2620689Image at ../data/upload/5/2620625Image at ../data/upload/0/2620620Image at ../data/upload/8/2620588Image at ../data/upload/1/2620461
Sub Page View
Today Page View: 51,109
Yesterday View: 73,351
30 Days View: 1,342,701

오늘은 6.25 ...(8)

Views : 2,079 2011-06-25 15:36
자유게시판 191251
Report List New Post

 

  

 

6.25 動亂 參戰 犧牲者

 

韓國軍은

 

전사자 415,004명을 포함하여

총 1,312,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美國軍은

 

전사자 33,665명

비전투 희생자 3,275을 포함하여

총 36,940명의 젊은 목숨을 바쳤다.

 

U.N 軍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희생되었다.

 

 

 

 

[ 미군이 촬영한 6.25전쟁 당시의 사진들 ]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들. 총이나 한 번 제대로 잡아보고 포로가 되었는지?


▲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날라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잇고"




▲ 1950. 8. 12. 북한군 포로.




▲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 1950. 8. 2. 금강철교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 미제




▲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라고 표기돼 있다. 엄마
젖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필자도 이런 곳에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 1950. 8. 15. 피난민 행렬




▲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2004 NARA




▲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 1951. 1. 2. 누가 이 여인을 모르시나요?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 1950. 10. 1. 소공동 일대




▲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질의 중... 30초 정도 걸려요 ...
  본 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Report List New Post
TODAM [쪽지 보내기] 2011-06-25 15:59 No. 191271
정말 화가 나는군요.
이승만이 미국의 바지를 붙잡으며 살려달라고 비굴하게만 안했다면
한국의 친일파들은 척살될수 있었겠지요. 게다가 미국의 속국으로 있지 않아도 되었을 터.
이승만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독립운동하던 많은 독립전사들이 죽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독립운동을 했던 자들을 "테러범"이라고 규정짓고 있지요.
아마 나이어린 친구들은 모를겁니다. 과거 일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하였던 전사들.
그들을 통솔하던 장군들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을 위해 싸운 이유를 모를겁니다.
저는 이승만을 떠올리면 이가 바득바득 갈립니다. 이완용은 차라리 양반이였습니다.
에이!!! 이성계같은 이승만.
수지44 [쪽지 보내기] 2011-06-25 15:59 No. 191350
191271 포인트 획득. 축하!
@ TODAM -
대한민국에 정신나간놈이 한둘이 아니네 ,대한민국을 부정하려면 지금도 굶주리고 헐벋은 생지옥
북한에가서 김정일,정은 평생 만세부르며 살아라.
동반의강자 [쪽지 보내기] 2011-06-25 16:01 No. 191277
그때당시 판자촌 집들이 흠사 필리핀 판자집 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출 [쪽지 보내기] 2011-06-25 18:43 No. 191380
지금도 고향에 못가시는 어머님 생각이 나네요.
처음 보는 사진들이 많아서 관심있게 봤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hi1000 [쪽지 보내기] 2011-06-25 19:07 No. 191387
이걸 전부 올리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대단한열정 당신은 진정한 필고 팬입니다
필카페24 [쪽지 보내기] 2011-06-25 21:27 No. 191450
좋은 자료 잘보고 갑니다....묵념...ㅡ.ㅡ;
CHOCO [쪽지 보내기] 2011-06-27 18:08 No. 192891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해 지네요...ㅠㅠ
자유게시판
필리핀 코로나19 상황
신규 확진자
+502
신규 사망자
새 정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No. 95343
Page 1907